밀레니엄 전후 10년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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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돌아보니 밀레니엄 전후로 10년의 삶이 세계 의학회를 중심으로 오롯이 내 뜻대로 살은 그때가 내 일생의 가장 핵심이 아니었나 싶다. 그때는 매년 고정적으로 봄 가을 미국내분비학회, ASBMR, NOF, 북미페경학회, 세계페경학회를 다니며 특별한 행사나 파티에도 많이 참석하였지만, 한번 출국의 연장으로 지중해 휴양 리조트나 이태리 스키장이 있는 특별한 리조트에서 휴양을 겸해 개최하는 소규모 전문인 연수회를 참석하며 서양 상류(이제 생각해 보니 그렇다) 사회의 생활 속에 들어가 특별한 문화를 많이 경험했다. 그래도 지치지 않는 열정만으로 국 내, 외 어디서든 그저 하루가 24시간으로 모자란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지금 도리켜 보니 내가 그 시절 지구의 끝에서 끝으로 날아다니며 체험한 순간순간이 특별한 경험과 삶이었고, 대단한 일인지도 모르고 대단한 일을 했었구나 싶다.
케냐 선교활동만 하여도 나이로비 대학교 의과대학생들 앞에서 강의를 하고, 언제든지 와서 강의하라고 교수 임명장을 받고, 당시 권위의 상징으로 짧은 지팡이를 들은 모이 대통령궁을 방문하고, 졸업생 학부모 등 10만 명이 참석한 웅장한 대학 졸업식장에서 대학 총장이기도 한 대통령 앞에 무릎 꿇고 서면 학위 모를 씌워주는 특별한 대학 졸업행사에 참석하여 박사학위를 받았고, 10만 명 군중 앞에서 답사를 하였고, 대학에 메인 건물을 건축 기증하였고, 아프리카에 어머니를 기리는 기념동판을 세웠으니 평범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대학을 후원했던 일이나 대학에서 요구한 내 전문분야의 강의나 논문 등도 매년 국외 학회를 참석하고 국내 대한폐경골다공증도움회나 대한골다공증학회 활동을 하며 쉽게 다 준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에 나는 특별히 힘들었다는 느낌이 없었다. 단지 무덤덤하게 국내 던 국외 던 주어진 내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외국 나가면 잠시 병원이고 집이고 한국 생활을 다 잊어버려서 좋았고, 귀국하면 외국의 일을 싹 잊어버리고 살던 때다. 그래서 그 케냐의 일도 단지 외국에서 보낸 일련의 다반사로 넘겼고 국내에 들어와선 국내 삶에 충실하였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 이외에도 흥미로운 추억이 많았는데 외국에서 있었던 일울 국내에 들어와 누구에게도 설명한 적이 없다. 설명할 대상도 없었고, 지금 코로나로 집에 머무는 여유로움에 인생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며 요즘같이 해외여행도 못 가고 답답한 시기에 케냐를 떠올리니 시원한 사파리가 머리를 잠시 식혀준다. 아울러 인상 깊던 장소들이 줄줄이 머리에 스친다. 초대받은 대통령궁. 대사집에서의 깔끔한 만찬과 럭셔리한 학장 집 만찬은 너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학장 부인의 미모엔 유색인도 저렇게 예쁠 수 있구나 함을 느꼈다. 주택단지 입구부터 보안과 경호가 철저하고 이웃집을 방문할 때 말을 타고 방문하는 대 저택들이 모여 있는 부촌 마을에 학장 집은 아프리카가 아닌 영화에 나오는 영국의 어느 한 저택 같았다. 떼 지어 지나가는 끝없는 줄의 홍학과 사파리에서 사자를 코앞에서 보았던 일이나 하이에나를 본다고 새벽 여명에 지프로 사파리 들판을 달리고 했던 날들이 모두가 특별하고 소중한 추억이구나 싶다.
이제 와 도리켜보니 당시 목사님의 권유를 선 듯 받아들이지 못했던 점이 오히려 죄송하고 이런 추억을 갖게 해준 목사님이 감사할 따름이다. 열심히 살다 보면 일생에 좋은 기회가 몇 번 주어진다는데 목사님이 주신 기회를 끝까지 거절했으면 이런 추억도 없었을 것이다. 어렵게라도 결국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주어진 기회를 잡았기 때문에 내 생에 이런 그림이 생겨 이렇게 추억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다. 한 사람의 일생에 그려지는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도 다른 사람의 도움이 있어야 가능하고 아무리 열심히 산다 해도 세상에 독불장군은 존재할 수 없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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